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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유럽 영화의 세 얼굴: 프랑스, 스칸디나비아, 그리고 영국

by 파파야지오 2025. 5. 26.

1. 프랑스: 누벨바그, 젊은 세대의 분노와 해방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는 물리적인 복구뿐 아니라 문화적 정체성의 회복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기존 영화계는 여전히 문학적 각색과 무거운 대사 위주의 전통적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었고, 이런 경직된 분위기에 답답함을 느낀 젊은 영화 비평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카이에 뒤 시네마』라는 영화 잡지를 통해 기존 상업 영화의 관습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감독은 작가(auteur)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이론에서 출발한 영화 운동이 현실이 되었고, 누벨바그는 프랑스뿐 아니라 전 세계 영화사에 가장 급진적인 변화를 몰고 오게 된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1959) 포스터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1959) 포스터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1959)는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도와 가정, 교육으로부터 소외된 한 소년의 시선을 따라간다. 장뤼크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1960)는 서사 구조를 거의 해체하다시피 하고, 파리의 거리와 즉흥 연기를 통해 자유로운 감각의 리듬을 창조했다. 이들은 영화라는 매체가 ‘어떻게 이야기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것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누벨바그 감독들은 저예산으로도 예술적 영화를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형식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동시에 새로운 표현의 자유를 열어젖혔다.

이러한 흐름은 단지 영화계의 변화로 그치지 않았다. 1950년대 말, 60년대 초는 알제리 전쟁과 드골 체제 등 사회적으로도 격변의 시기였다. 누벨바그는 청년 세대의 혼란, 회의, 반항을 대변했고, 그런 점에서 이들은 단순한 예술가가 아니라 시대의 목소리였다.

 

2. 스칸디나비아: 잉마르 베르히만, 영화로 묻는 인간의 의미

 

전후 유럽 영화의 또 다른 축은 북유럽, 그중에서도 스웨덴에서 솟아올랐다. 잉마르 베르히만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전쟁 이후의 인간 존재를 탐색했다. 그의 영화는 전쟁의 물리적 상처보다는 그로 인해 붕괴된 신념과 신에 대한 회의, 인간 사이의 단절에 집중했다.

『제7의 봉인』(1957)은 죽음을 의인화한 인물과 기사 사이의 체스 게임을 통해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신에 대한 질문을 환상과 상징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한편, 『산딸기』(같은 해)은 늙은 교수의 하루 여정을 따라가며, 기억과 꿈, 상처, 화해를 교차시키는 서정적 구조를 통해 인생을 되짚는다. 베르히만은 극도로 절제된 연출 속에서 배우의 표정과 침묵으로 이야기를 끌어갔고, 복잡한 인간 심리를 시적인 영상 언어로 구현해냈다.

스웨덴이라는 외부 세계와 상대적으로 단절된 공간에서 그는 오히려 더욱 보편적인 주제를 직시했다. 고독, 죄의식, 가족, 종교, 여성성 같은 주제는 시대와 국가를 넘어 전 세계 관객의 마음에 닿았다. 특히 그가 여러 작품에서 협업한 배우 리브 울만과의 연기는 감정의 미세한 떨림까지 포착하며, 영화가 얼마나 정밀한 예술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3. 영국: 카메라를 노동자의 삶으로 돌리다

 

영국 영화는 전통적으로 문학성과 연극성을 중시해왔지만, 전쟁 이후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전후의 재건과 복지국가 논의 속에서, 영화계 역시 계급 문제와 도시 노동자들의 삶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런 흐름은 다큐멘터리적 시선을 가진 ‘프리 시네마(Free Cinema)’ 운동으로 이어졌고, 이후 영국 뉴웨이브라는 이름으로 본격화된다.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까지 등장한 이 영화들은 감정 과잉을 자제하고, 거칠고 현실적인 톤으로 산업 도시의 일상과 소외를 그렸다. 토니 리처드슨의 『분노의 봄』(1959)은 젊은 세대의 정체성 혼란과 계급적 반항을 날것 그대로 보여줬고, 카렐 라이즈의 『이 세상 끝까지』(1962)는 개인의 욕망과 사회적 억압의 충돌을 통해 냉정한 시대 인식을 드러냈다.

이들 영화는 전통적인 상류 계급 중심의 이야기가 아닌, 공장 노동자, 실업자, 미혼모, 젊은 실업자 같은 주변부 인물들을 중심에 세웠다는 점에서 진일보했다. 그들은 영웅도 아니고 반영웅도 아닌, 그저 ‘살아가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이후 켄 로치와 마이크 리가 이 전통을 계승하면서, 영국 리얼리즘은 21세기까지도 지속적인 사회 비판의 도구로 기능하고 있다. 특히 켄 로치의 영화는 복지 제도의 허점을 고발하고, 이민자·노동자 계층의 현실을 꾸밈없이 그리며 현대 유럽 영화에서 드물게 정치적 울림을 유지하고 있다.


전후 유럽의 세 지역은 저마다 다른 조건에서 영화를 만들어갔지만, 모두 현실을 정직하게 응시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큰 흐름으로 묶인다. 프랑스는 영화 언어를 해체하며 자유를 찾았고, 스칸디나비아는 인간의 내면을 탐색하며 사유의 깊이를 더했으며, 영국은 사회의 밑바닥을 향해 카메라를 돌리며 냉철한 시선을 유지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인간의 상처는 남아 있었고, 그 상처를 마주하는 방식은 곧 새로운 영화의 얼굴이 되었다. 유럽 영화는 바로 이 시기, 단순한 오락을 넘어 예술로서, 발언으로서, 질문으로서의 영화로 성장했다.